믿음이란 무엇일까? 신에 대한 믿음의 깊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 목숨까지 내어 놓으면서 저버리지 않는 확신에 찬 신념의 근원은 무엇일까? 신의 은총, 그것은 만질 수도 보이지도 않는 막연한 타인의 거리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혀가 닳고 두 손이 굳도록 기도하던 절절함은 진정 한 인간의 정신적 힘만으로는 가능했을 것 같지가 않다.
부모나 임금의 말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천주교의 교리 하나로도 충분히 적대시 되던 1801년 조선 땅은 핏빛 하늘이었다. 전통적인 삶의 방식과 사상이 정면 대치되면서 천주교 신자들에게 그악한 억압이 가해졌다. 단지 천주교를 믿었다는 것만으로 많은 사람들이 반역자로 지목되어 죽음을 당하거나 귀양을 가야 했다.
<이순이 루갈다 옥중편지>는 종교의 자유가 없던 때 천주교 신자 이경도·이순이·이경언 삼남매가 감옥에서 사형을 기다리며 어머니와 가족, 친지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들의 옥중편지에는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심과 형제간 우애, 이웃에 대한 애정, 그리고 깊은 신앙심이 절절하고 진솔하게 담겨 있다. 이순이의 옥중편지는 20세의 처녀가 쓴 글이라고 믿기지 않게 문장이 수려하고 뜻이 깊다. 그도 그럴 것이 이순이의 가문은 본가와 외가 모두가 당대에 한다 한 선비 집안이었다. 이순이의 정서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은 어머니 권씨 부인이었다. 이순이가 모범적으로 실천한 효도와 우애 그리고 아녀자의 도리, 깊은 지식, 한글과 한문의 실력은 가정교육의 결과였다.
이순이 루갈다의 부친은 지봉 이수광의 8대 후손이며 권철신의 매부인 이윤하였다. 수준 높은 집안의 여인으로 서학인 신앙생활을 통하여 덕행과 부덕을 실천하고 사회적인 인식과 안목이 높았다. 어려서 주문모 신부한테 영성체를 받고 하느님 은혜에 보답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순이와 유중철의 결혼생활은 성요셉과 성마리아의 부부생활과 같았다. 당시에는 신앙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동정생활은 물론이고 일반적인 신앙생활도 하기 어려웠다. 결혼 전이나 후나 천주교의 덕행을 닦는데 전심한 이순이는 감탄할 만큼 온순하고 친절하여 많은 가족들과 불화가 전혀 없었다.
일찍이 역사가는 이순이를 한국 순교자들 중 가장 훌륭한 인물로 평가했다. 다블뤼 주교는 1858년 편찬한 <한국 주요 순교자 약전>에서 “우리는 한국 순교자들의 보석인 이 소중한 이 루갈다의 생애가 황금글자로 묘사되기를 바란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부족하나 옥중편지들이 보충해 줄 것으로 생각 한다”고 하였다.
천주교호남교회사연구소에 발간한 <이순이 루갈다 남매 옥중편지>는 현재를 사는 이들, 적어도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시사하는 바 깊다. 지난 시대 모진 박해로부터 천주교를 지켜낸 정신적 뿌리를 느낄 수 있으며 조선시대 사회 현실과 신앙생활을 엿볼 수 있다. 서로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동정부부 생활을 굳건하게 실천한 이순이 부부의 삶은 가정의 의미와 정체성을 깨닫게 하고 가족의 사랑을 느끼게 해준다. 신앙에 대한 절대적 믿음과 한 인간의 번민도 고스란히 담겨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도 깊이 침잠하게 만든다.
종교와 무관한 이라도 신앙에 대한 통찰과 역사 속 천주교의 존재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쉽고 친근하게 번역되어 누구나 이해가 쉽고 한편의 장대한 서사시를 읽은 감동이 녹아 있다.
이순이는 편지의 말미에서 “편지에 잔뜩 장황하게 늘어놓은 많은 말로 자신은 착하지도 못하면서 남들에게는 착하라고 권했습니다. 참으로 저야말로 길가 장승처럼 사람들에게는 길을 가르쳐 주면서 자기는 자신 길을 가지 못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사람의 말은 참되다 하지요.”라며 자신의 말대로 착한 공을 쌓아 이 다음에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자고 언니들에게 당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