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영·정조 시대, 사람과 땅과 가문이 궁벽한 삼벽(三僻)의 땅 장흥에서 태어난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의 문집이다.
《존재집》에는 사단칠정논쟁 등 성리학 논쟁에서부터 ‘정현신보(政絃新譜)’ㆍ‘만언봉사(萬言封事)’ 등의 사회 비판 개혁론은 물론 역사, 지리, 격물(格物)이 폭넓게 집적, 수록되어 있다. 열정적인 독서와 사색을 통해 책임 있는 지식인의 삶을 도모했고, 그 결과는 문집 《존재집》에 오롯이 담겨 있다.
「만언봉사」는 1796년(정조 20) 정조에게 올린 것으로 성학(聖學)을 밝힘으로써 사도(邪道)를 물리치는 것을 근본 사상으로 하여 폐정을 광정(匡正)하고 정치 제도를 개선하자는 내용이다. 저자의 경세적인 면모를 볼 수 있는 자료이다.
「대황사간봉사(代黃司諫封事)」는 학교·문체(文體)·용인(用人)·군현·노비·무선(武選)·관직 등의 폐단을 들어 시정을 확립할 것을 주장한 내용이다. 「독서차의」는 사서를 공부하면서 경문과 전문(傳文)의 훈고를 중점적으로 다루며 장(章)마다 상세하게 주석을 가한 것이다. 저자의 학문적 심오함을 살필 수 있음은 물론이고, 사서를 공부하는 데에도 훌륭한 참고서가 되는 저작이다.
「격물설(格物說)」과 「원류(原類)」는 유교 철학 사상을 찾아볼 수 있는 자료이다. 「정현신보(政絃新譜)」는 저자의 정치 철학과 실학 사상을 가장 잘 대변하는 것으로, 학교·공거·용인·군현·관직·전제(田制)·노비·군제(軍制)·무선·조운·궁둔(宮屯)·전결(田結) 등 13조에 달하는 시폐를 설정하여, 당시의 사회 현상과 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조목조목 피력하고 있다.
국역본 6권과 교감표점본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위백규(魏伯珪) 1727(영조3)〜1798(정조22). 조선 후기 학자로,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자화(子華), 호는 존재(存齋)ㆍ계항운민(桂巷耘民)이다. 전라도 장흥 계춘동(桂春洞)에서 태어났으며, 천관산(天冠山) 자락의 장천재(長川齋)에서 면학하여 생원진사시와 한성시(漢城試) 등에 합격했다. 1751년(영조27)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에게 스승의 예를 올렸으며, 훗날 ‘존재’라는 호를 받았다. 그 후 고향 장흥에 머물면서 향촌 교육과 저술에 힘썼다. 1794년(정조18) 8월 위유사(慰諭使) 서영보(徐榮輔)의 추천으로 저술과 덕행이 조정에 알려져, 정조(正祖)가 《환영지(寰瀛誌)》 등의 저서를 올려보내라는 명을 내렸고, 이어 옥과 현감(玉果縣監)에 제수하였다. 뒤이어 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ㆍ경기전 영(慶基殿令)에 제수되었지만 부임하지 않았다. 특히 《정현신보(政絃新譜)》와 〈만언봉사(萬言封事)〉 등에서 당시 조선 현실을 비판하며 정치, 경제, 교육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1805년(순조5) 고을 유생들이 발의하여 다음 해 죽천사(竹川祠)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존재집(存齋集)》, 《환영지》, 《속집대명기(續集大明紀)》, 《지제지(支提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