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책⟫은 한 번의 배교를 통해 일생을 고통스럽게 살아가며, 삶의 구체적인 일상에서 성찰과 통회를 통해 자신을 성화하고, 하느님께로 돌아간 기록이다. 순교자의 영웅적인 기록과는 달리 배교자로서의 인간적 갈등과 고뇌, 아픔을 승화시켜 나간 신앙선조들의 귀중한 유산으로 평가된다. 오늘날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처럼 늘 하느님을 박해하고, 배반하고, 그러면서도 다시 돌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양심의 문을 두드리는 한 배교자의 고백 유배지에서 써내려간 지식인의 고뇌와 자기 성찰
인디언들의 옛 이야기에 따르면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세모난 쇳조각이 있다고 한다. 사람이 나쁜 짓을 할 때마다 쇳조각이 돌아가면서 그 사람의 마음을 쿡쿡 찌르는데, 이때 느끼는 아픔이 죄책감이라고 한다. 이 세모난 쇳조각은 양심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이렇듯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신을 꾸짖고 뉘우치는 행위를 ‘자책’이라고 한다. ‘자책’은 자동사다. 책에서, 누구도 그의 등을 떠밀지 않았지만 저자는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고 성찰한다. 이 책의 저자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 교회 창립직후 가해진 대대적이고 전면적인 신유박해(1801) 즈음에 흥해(지금의 포항)로 유배를 간 천주교인으로 보인다. 당시 천주교인들은 이 박해를 통해 약 1백여 명이 옥사하거나 처형되고 수백 명이 유배되었는데, 저자는 아마 그중 하나였을 것이다. 『자책』은 배교 후 귀양을 갔던 자의 자기고백서다. 책은 유배생활에 대한 성찰, 통회의 의미와 필요성, 십계 등의 기준에 따라 자신을 돌아보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회심의 마음을 담고 있다. 그런데, 왜 ‘순교자’가 아니라 ‘배교자’인가? 순교자의 기록은 많이 발굴되고 정리되어 있는데 반해 배교자는 주목받지 못했다. 사실, 오늘날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과 닮은 것은 오히려 배교자들이다. 이 책에 주목하는 것은 신념을 쫓고, 배반하고, 그러면서도 다시 돌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순교자의 영웅적인 기록과는 달리 인간적 갈등과 고뇌, 아픔을 승화시켰던 흔적들은 귀중한 유산으로 평가된다. 또한, 저자는 책에서도 밝혔듯 ‘도끼에 맞아 죽는 이는 잠시 고통 속의 치명이거니와, 숨어서 수행을 하는 사람이나 고통을 참고 수행하는 사람의 공부는 곧 일생이 치명이라 더욱 어렵다’며 오히려 유배지에서의 경험이 그를 순교자적 삶으로 전환시켰음을 시사한다. 반성의 어원에 해당하는 ‘reflexio'는 빛의 반사를 의미한다. 그래서 거울은 자주 반성의 비유적 표현으로 등장한다. 자신을 성찰하려면,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의 거울이 더러워지지 않게 자주 닦아야 한다. 그러나 마음의 거울은커녕 실제 거울을 들여다볼 시간도 없는 바쁜 현대인에게, ‘자신을 성찰하라’는 메시지는 와 닿기 힘들 것이다. 당장에 닥친 시급한 문제도 아니고, 돈을 벌어다 주지도, 그 성과가 눈에 보이지도 않아서다. 그럼에도 『자책』은 모든 연고가 끊어진 유배지에서 혼자 고뇌하는 고독한 수행적 삶을 보여주며, 참된 성찰의 본보기가 되어 잠시라도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어줄 것이다. 분량이 많지 않아 가볍게 읽을 수 있고, 원문과 해석문, 영인본도 함께 실었다.
│본문 속으로│ 만일 이 모양으로 죽게 되면 주님의 자녀가 되지 못하고, 영원한 천당과 무궁세(無窮世)에 비할 데 없는 진복(眞福)을 얻지 못할 것이니 어찌 한심 가련하지 않겠는가, 살아 금세(今世)에서의 세복(世福)도 잃고 죽어 후세(後世)의 천복(天福)도 또한 잃을 것이니 세상복, 천당복 두 가지 복을 잃어버릴 것이오, 이승에서는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면치 못할 것이니 세상의 감옥과 지옥을 어찌 다 견디자는 말인고. 목숨은 죽을 날이 가까워 오고 행하는 일은 나날이 지옥이 가까워 오니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탓하리오. -17p
의복과 음식은 육신을 기르는 재료요, 덕행과 신앙의 실천은 영혼을 기르는 양식이라. 오늘 하루 두세 번의 음식을 먹지 못하면 육신이 굶주릴 것이요, 아침과 저녁기도를 하지 않고 지나치면 영혼이 때를 놓치는 것이라. 육신이 오늘 아침밥을 굶으면 저녁에 비록 두 그릇의 밥을 먹어도 한 끼니에 두 그릇을 먹은 것이지 아침은 굶은 것이고, 영혼이 때를 놓치고 그 후에 경문을 외워 보속을 하여도 그때는 놓친 것이 되는지라. 어찌 아깝지 아니하리오. -21p
제오계 ‘살인을 말라.’하였으니 사람을 죽이는 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도다. 남을 밀쳐 상하게 하였으면 이는 손으로 살인한 죄요, 혹 말로 사람을 죽이고자 하였거나 혹 목이 부러지라고 하였거나 혹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 몹시 욕을 보여 남으로 하여금 죽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거나, 혹 남의 잘못을 은밀하게 말하여 해를 끼치거나, 혹 남의 악행을 드러내어 그 사람의 신세를 꺾었으면 이는 모두 입으로 살인한 죄라. 혹 내게 조금 해롭게 한다 하여 남을 몹시 미워하거나, 혹 속으로 그놈 죽으면 시원하겠다 하거나, 그 사람이 망신당하기를 원하면 이는 마음으로 살인한 죄이니, 이상 수단은 다 사람의 육신을 죽인 죄라. -45~46p
김영수 한국가톨릭문화연구원 학술이사로 있다. 저서로 『필사본 심청전 연구』(민속원, 2000), 『천주가사자료집』(가톨릭대학출판부, 2001, 『교주천주가사』(한국교회사연구소, 2005), 『한국그리스도교 민속론』(공저, 민속원, 2014) 외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