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문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희곡에서, 해설과 대사 이외의 부분으로 등장인물의 동작이나 표정, 심리, 말투 등을 서술한 글이며, 문제 풀이의 바탕이 되도록 주어진 글 혹은 손가락 안쪽의 끝에 있는 살갗의 무늬를 말한다. 한 단어 안에도 이렇듯 다양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데, ‘시’는 말할 것도 없다. 시와 소설을 평론하는 작가는 시의 일상화와 대중화를 좀 더 진전시킬 수 있길 바랐다. 그리하여 2006년부터 2년여 간 일주일에 한 번씩 신문에 연재한 「이동희의 명시 산책」을 다듬고 묶어 독자를 만나게 되었다. 명시 산책 첫해 1회부터 50회까지는 ‘우리 시조의 재발견’을, 둘째 해 51회부터 100회까지는 ‘우리 현대시의 재발견’을 산책의 소재로 삼아 집중 조명하였다.
2권에는 50여 편의 현대시와 더불어 깊이 있는 통찰로 독자들을 이끈다. 시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 독자들도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쓰여, 정형화된 기존의 시 해석을 기억하는 독자들이 느끼는 거리감을 줄였다. 실제적인 삶의 경험을 토대로 시와 버무려 풀어내는 솜씨에서 노련미가 느껴진다. 작가는 2008년 한 인터뷰에서 “문학은 사람살이에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높은 지위를 갖고 재산이 많다한들 사람살이에 역행하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겠”냐며 자신의 문학관을 피력했다. 『시의 지문 』은 일반 독자에게 해독할 수 없는 문제처럼 느껴지는 시 해석에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시행에 숨은 화자들의 심리와 표정, 동작을 추적하여 드러내줌으로써 문자로만 박제되어 있던 현대시를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본문 속으로│
이러니 “지금(식민지가 된)은―들(조국의 영토)을 빼앗겨(국권 상실) 봄(자연의 질서)조차 빼앗기것네(잃어버림)”라고 탄식한다. 이 시적 발상은 두보가 ‘나라는 박살났어도 산하는 그대로 있다’는 발상과는 궤를 같이하면서도 결정적으로 차별화된 시의식이다. (중략) 아마도 필자가 겪는 ‘봄 몸살’은 자연성에 회귀하고자 하는 본능의 발현이 아닌가 짐작된다. 농촌에 회귀하고자 하는 마음, 시골로 귀향하고자 하는 희망, 자연에 귀의하고자 하는 의식을 몸살로만 앓다가 마는 것은 아닌지? 온몸에 햇살을 밟으며 발목이 시리도록 부드러운 흙을 밟으며, 좋은 땀조차 흘려 보지 못하고 마는 것은 아닌지? 봄만 되면 몸살을 한다. 정녕, 들(도시생활에 젖어서)을 빼앗겨 봄(자연의 생명성)조차 빼앗기겠네!
- 74~76p
고귀한 꿈을 지닌 자는 외롭다. 고독한 꿈을 꾸는 자는 고귀한 존재다. 과거의 신분이 그것을 입증해 주는 것이 아니고, 미래를 지향하는 바람이 그것을 증명하지 못한다. 현재 고독한 자는 고귀한 자이며, 현재 꿈꾸는 자는 고귀한 자다. 절대 순수는 무엇으로부터 침해되지 않는 순수 혈통의 자아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생활에서, 이상에서, 정서에서의 순수 혈통! 유한하고 절대적 존재로서의 자아를 찾으려 몸부림치기 때문이다. 먼 데 전설도 현실은 아니며, 향기로운 지위도 힘은 아니다. 참된 자아는 홀로임을 자각하고 실천하며 즐김으로써 스스로 고귀해지는 존재다. 외로운 꿈을 꾸는 존재다.
- 181~182p
무소유의 진짜 개념을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에서, ‘필요 이상으로 지니지 않은’으로 수정해야 한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것을 무소유의 진짜 개념으로 고집하다 보면 말만 있고 실현이 없는 공허한 장난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욕망의 수치를 낮추면 누구나 ‘무소유’는 가능하다. 그러므로 지나친 욕망을 자제하라는 말뜻으로 무소유를 실현하면 인생이 또 다른 진면목을 만날 수도 있으리라. 이렇게 본다면 순수와 비순수의 분별도 그리 어렵지 않다. 순수한 상태에다가 욕망이 옷을 입힐 때 곧바로 비순수-가짜로 전락하게 된다. 욕망이란 무엇인가? 저절로 그렇게 된 상태를 억지로 다른 상태-‘필요 이상’으로 비틀어 놓으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모든 생명 있는 것들로부터 저들의 자연을 빼앗아 인간의 사연을 채우려는 것이야말로 가장 비순수한 욕망의 절정이 아닐 수 없다.
-289p
이동희
1946년 전주에서 출생, 완주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으며 전주대, 고려대, 조선대(국문학 박사)에서 공부하였다.
1985년 시전문지 『心象』 신인상으로 등단, 전북시인협회 초대회장, 표현문학회·전북문인협회·전주풍물시동인회·심상시인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현재는 유연문예교실·부안문예창작반·전북문예교실을 통해서 창작 실기지도를 하고 있다.
시집으로 『빛더듬이』(심상사)·『사랑도 지나치면 죄가 되는가』(도서출판 둥지)·『은행나무 등불』(현대시)·『벤자민은 클래식을 좋아해』(시선사)·『북으로 가는 서정시』(모아드림)·『하이델베르크의 술통』(모아드림)·『뜻밖의 봄』(모아드림)·『차가운 그림문자』(시와표현)가 있다. 수상록으로는 『숨쉬는 문화 숨죽인 문화』(도서출판 동지)·『우리 시대의 글쓰기』(수필과 비평사)가 있으며, 시 해설집으로 『누군가 내게 시를 보내고 싶었나봐』(흐름), 『시의 지문1·2』(흐름)이 있다. 또한 『문학의 즐거움 삶의 슬기로움』(신아출판사)·『문학의 두 얼굴』(도서출판 작가)·『임꺽정과 서사문학 연구』(흐름)·『시를 읽는 몇 가지 방법』(흐름) 등의 문학평론집이 있다. 더불어 ‘국악실내악단-한음사이’에서 창작곡 『전주십경-전주십미』·창작 칸타타 『루갈다』 전작 가사를 작시하였으며 창작 칸타타 『단야 아가씨』를 작시하였다.
전북문학상(2000), 표현문학상(2001), 전주시예술상(2002), 목정문화상(문학부문, 2008)을 수상하였다.
머리말
1부 – 봄철마다 겪는 몸살 01 삶은 끝없는 질문이요 대답이다 02 역설의 진실 03 사랑은 꿈꾸는 일이다 04 설화가 그리는 정겨운 풍경 05 관조가 낳은 사유의 즐거움 06 이별도 또 다른 사랑이다 07 같음과 다름, 혹은 대립과 융합의 세계 08 단심(丹心)으로 물들게 한 애국시 09 예술은 일상의 삶 속에 있다 10 봄철마다 겪는 몸살 11 노래의 영혼을 불러오는 감정이입(感情移入) 12 짧은 시, 긴 예술 13 사랑, 인생의 업보이자 행운 14 영원한 안식처에 대한 망향가 15 머리 숙여 성찰할 줄 아는 역사의식 16 우리에게 ‘그날’은 왔건만… 17 남쪽, 삶의 목적이 있는 방향
2부 – 외로움은 고귀한 꿈 18 오월의 산하는 신령스럽다 19 꽃은 피고 지며 영원을 간다 20 역사를 응시하는 목가적 서정 21 모성 회귀로서의 이상향 동경 22 분수처럼 흩어지는 우울한 심상(心象) 23 눈으로 읽는 소리 없는 이념 24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실패하는 것이 낫다 25 두 모습의 자아 26 외로움은 고귀한 꿈 27 뜨거운 인생은 항상 출항한다 28 푸르른 의식, 건강한 아름다움 29 눈물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30 가을, 투명한 불행 고독한 행복 31 민족 정서의 청량제 32 비, 자연의 위대한 몸짓 33 아, 그 아득한 절망적 아름다움이여! 34 저 차등 없어 가난한 행복
3부 – 비순수의 순수 35 기승전결, 완벽한 창조의 패턴 36 깨달음, 최고의 인생 봉우리! 37 인생은 나그네 길 38 생활이 시고, 시가 생활이다 39 이별은 침묵의 언어다 40 말은 창조의 도구다 41 제 얼굴에 책임지는 삶 42 비순수의 순수 43 추억의 아름다움과 힘 44 역사의 교훈 45 국민의 수준에 맞는 정부 46 어떤 이름으로 남을 것인가? 47 날마다 개벽하는 인생 48 형언할 수 있는 아름다움의 한계 49 생명의 탄생을 엿본 시인의 불경 50 삶을 진동시키는 시의 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