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론이 역모를 꾀한다’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이 남긴 파장은 실로 컸다. 사형당한 이가 20여 명, 국문을 받다 장살(杖殺)된 이가 30여 명, 연루자로 교살된 이가 10여 명, 유배된 이가 100여 명을 넘었다. 집안의 몰락을 보다 못해 목숨을 끊은 부녀자도 9명이었다. 신임사화(辛壬士禍)로 불리는 이 비극적 사건의 뿌리는 자신들이 지지하는 인물을 국왕으로 추대하려했던 노론의 당론에 있었다.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조태채(趙泰采)와 함께 노론의 영수(領袖)로서 연잉군의 왕세자 책봉에 노력하던 이건명(1663〜1722)은, 이로 인해 1722년(경종2) 전라도 흥양(興陽)의 뱀섬[蛇島]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같은 해 4월 5일, ‘죄인’ 이건명은 귀양지를 같은 현에 있는 나로도(羅老島)로 옮겼다. 그리고 넉 달 뒤, 선전관(宣傳官) 이언환(李彦瑍)·금부도사(禁府都事) 이하영(李夏英)이 입회한 가운데 전라도 흥양에서 참수에 처해졌다. 대신(大臣)으로서 역적으로 몰려 귀양지에서 참수된, 조선 시대에서 찾아보기 힘든 죽음이었다. 이의현(李宜顯, 1669〜1745)은 노론 4대신 중 한 명인 조태채의 묘표(墓表)에 이어 이건명의 묘표까지 쓰게 되었다면서 이건명이 천고(千古)에 없는 일을 겪었다고 말했는데, 참수라는 참혹한 일은 분명 흔한 일이 아니었다.
이건명의 정치 활동을 고려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균역법의 선구자로서 그의 역량이다. 양역 변통에 대한 논의는 이건명이 젊은 관원으로 있을 때 시작되었다. 그의 주장은 군포 2필을 1필로 줄이자는 감필론(減疋論)과, 수령이 사사로운 용도로 쓰는 전결잡역가(田結雜役價)를 감필에 따른 부족한 재정에 보충하자는 취지의 결역전용책(結役轉用策)으로 요약될 수 있다. 알다시피 이런 주장은 뒷날 영조 때의 균역법 제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이건명이 호서(湖西)의 임천(林川), 호남(湖南)의 남원(南原), 영남(嶺南)의 의령(宜寧)에 시험할 것을 청하여 경종의 허락을 받았으나, 이건명이 화를 입자 결국 이 사안도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건명은 참수되며 다음과 같은 절명시를 남겼다.
나라 위한 충심 간직하고許國丹心在 사생을 하늘에 맡겼어라死生任彼蒼 외로운 신하 오늘의 슬픔孤臣今日慟 선왕을 뵐 면목이 없도다無面拜先王
《한포재집》은 이건명의 문집이다. 이건명의 시문(詩文)은 사후 손자 이복상(李復祥)에 의해 수집, 편차되었다. 아들 이면지(李勉之)와 이술지(李述之)는 임인년 옥사(獄事) 때 아버지 이건명과 함께 옥사(獄死)하였고, 이면지의 아들 이복상이 화란 속에서도 잘 보전된 유고(遺稿)의 간행을 도모하였다. 이복상은 1758년(영조34)에 지은 〈발문(跋文)〉에서, 남군(南郡) 수령으로 있을 때 간행을 도모하였으나 파직되어 계획이 중단되었는데, 이후 홍봉한이 호조 판서로 있으면서 노론 4대신의 충렬(忠烈)을 높인다는 뜻으로 문집 간행 비용을 자임하여 1758년과 이듬해에 걸쳐 본집을 교서관 활자로 간행하였다. 본 《한포재집》은 손자 이복상이 만들어 놓았던 정고본을 바탕으로 1758년(영조34)에 10권 5책으로 간행되었다.
《한포재집》은 소차·계사·수의·교서 등에서 당시 정치 및 사회 사정을 살피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들을 읽을 수 있다. 권1·2에 시 311수, 권3∼7에 소차(疏箚) 108편, 계사(啓辭) 19편, 권8에 수의(收議) 20편, 전(箋) 4편, 과제(課題) 2편, 교서(敎書) 7편, 비답(批答) 3편, 애책문(哀冊文) 1편, 권9에 서(序) 5편, 기(記) 2편, 제발(題跋) 4편, 잡저 4편, 묘갈명 2편, 묘지명 2편, 묘표 1편, 행장 3편, 권10에 제문 34편, 애사 4편, 서(書) 5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국역본 3권과 교감표점본 1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건명(李健命)
1663(현종4)〜1722(경종2).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강(仲剛), 호는 한포재(寒圃齋),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1686년(숙종12) 춘당대 문과에 급제하였고, 우승지ㆍ대사간ㆍ이조 참의ㆍ이조 판서ㆍ좌의정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경종 즉위 후 좌의정으로 승진하여 김창집(金昌集)ㆍ이이명(李頤命)ㆍ조태채(趙泰采)와 함께 노론의 영수로서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에 진력하였으나, 이로 인하여 반대파인 소론의 미움을 받았다. 1722년에 노론이 모역한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전라도 흥양(興陽)의 나로도(羅老島)에 유배되었다가, 그해 8월 19일에 유배지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재상으로 있을 때 민생에 깊은 관심을 보여 양역(良役)에 있어서 감필론(減疋論)과 결역전용책(結役轉用策)을 주장해, 뒷날 영조 때의 균역법 제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송시열(宋時烈)을 학문과 정치의 모범으로 숭배했으며, 김창집 형제 및 민진원(閔鎭遠)ㆍ정호(鄭澔) 등과 친밀하였다. 과천의 사충서원(四忠書院), 흥덕(興德)의 동산서원(東山書院), 나주의 서하사(西河祠)에 제향되었고, 저서로 《한포재집》이 전한다.
국역 한포재집 1책 해제 《국역 한포재집》
제1권 시 詩
제2권 시 詩
국역 한포재집 2책 제3권 소차 疏箚
제4권 소차 疏箚
제5권 소차 疏箚
제6권 소차 疏箚 제7권 소차 疏箚 계사 啓辭
국역 한포재집 3책 제8권 수의 收議 전 箋 과제 課製 교서 敎書 불윤비답 不允批答 애책문 哀冊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