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정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를 부친으로, 좌의정 탄수(灘叟) 원두표(元斗杓)를 장인으로 둔 화려한 문벌 출신 이민서(李敏敍, 1633~1688). 그러나 지병(持病)으로 광질을 앓아, 관직에 종사하면서 두 번이나 자해를 시도하여 입방아에 올랐다. 이로 인해 현종조(顯宗朝)에는 더 이상 청요직(淸要職)을 제수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신환국(庚申換局) 이후 기다렸다는 듯이 대제학에 제수되어 오래도록 문단(文壇)을 주도하였으니, 이는 오로지 그의 문장 능력 덕분이라고 하겠다.
이민서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평가를 보면, 그의 문장력과 아울러 청렴함을 인정하고 있는데, 《숙종실록》에 기록된 그의 졸기에 따르면 “직위가 총재(冢宰)에 이르렀으나 문정(門庭)은 쓸쓸하기가 한사(寒士)와 같았으며, 한결같이 청백(淸白)한 절개는 처음에서 끝까지 변함이 없었다. 문장(文章) 또한 고상하고 건아(健雅)하여 온 세상의 추앙을 받는 바가 되어, 국가(國家)의 전책(典冊)도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왔다.” 하였다. 반대로 현안을 파악하고 폐습을 개혁하는 데는 적극적이었다. 방납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실시한 대동법의 규정을 엄격히 할 것을 건의하였고, 화전 금지와 산림 보호를 청하였다. 그는 백성을 진휼하고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군제의 개혁을 강하게 주장하였고, 총융청과 수어청을 변통하라고 건의하였다.
이민서의 관직 활동은 붕당의 폐해가 극심했던 현종과 숙종조 내내 정계에 있으면서도 삭직이나 유배를 당한 일이 없다는 점과 맡은 직임에 따라 해당 현안을 파악하여 실무를 적극적으로 행하려 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그는 평소 청렴한 성품에다 실무에 밝은 재능을 갖추고, 노소(老少) 분당 이전의 수많은 서인들과 폭넓게 교유하며 정계에서 입지를 다져 왔다. 이를 발판으로 경신환국(庚申換局) 이후 대제학과 판서를 두루 역임하다가 기사환국(己巳換局)이 발생하기 한 해 전에 졸하였다. 이민서의 시문(詩文)은 그의 사후, 아들 이관명(李觀命)과 이건명(李健命)에 의해 편찬, 간행되었다.
《서하집(西河集)》은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간행한 한국문집총간 144집 소재 동 제목의 원문을 대본으로 번역하여 출판되었다. 당대에 문장력을 인정받았던 서하 이민서의 다양한 시문이 전7책(국역 5권, 교감표점 2권)에 담겨 있다. 그중 권15에는 부친 이경여(李敬輿, 1585~1657)의 행장이 있다. 인조대 병자호란을 전후하여 조정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인 만큼 《인조실록》에 활동과 행적이 다수 수록되어 있고, 그의 문집인 《백강집(白江集)》이 있어 생애를 재구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민서가 쓴 〈선고영의정부군가장(先考領議政府君家狀)〉은 연대별 정리의 정확성, 포괄성에서 효율적인 자료이다. 특히 인조~효종대 쟁점이 되었던 대동법(大同法), 호패법(號牌法) 등 개혁 논의, 조정의 동향, 공식 기록에서 발견하기 힘든 인적 교류 등을 상세히 살필 수 있다.
이민서(李敏敍)
1633(인조11)~1688(숙종14).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이중(彛仲), 호는 서하(西河),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650년(효종1) 진사시에 합격하고, 1652년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검열·정언·지평·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660년(현종1)에 호조 판서 허적(許積)의 전횡을 탄핵했다가 병조 좌랑으로 전직되었다. 1677년(숙종3)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있을 때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박광옥(朴光玉)의 사우(祠宇)를 중수(重修)하고, 김덕령(金德齡)을 제향하였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많은 시문을 남겼으며, 김수항(金壽恒)·이단하(李端夏)·남구만(南九萬) 등과 교유가 깊었다. 나주의 서하사(西河祠)와 흥덕의 동산서원(東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서하집》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