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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
[이전] 순교, 생명을 대변하는 증거    [다음] 황진 장군 가문의 고문서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
저자
주철희
펴낸날
2017년 10월 11일
정가
할인가
페이지
368쪽
출판사
흐름출판사
분야
역사
ISBN/ISSN
979115522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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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의 학살을 거부한 군인들의 봉기 “여순항쟁”
국가는 왜 이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나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진실에 대한 이야기다.
  ‘여순항쟁’은 아직 생소한 단어 중 하나다. ‘여수순천사건’이라고 하면 교과서에서 배웠던 한 구절 정도가 스쳐 지나갈 것이고, ‘빨치산’ 혹은 ‘빨갱이’에 이르면 단어에서 느껴지는 이물감에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할지도 모른다.
   여순사건은 여순반란사건,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여순봉기, 여순항쟁, 여순군란 등으로도 불리며 제주4·3사건과 함께 민족사의 비극적 사건 중 하나이다.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강력한 반공국가를 구축해 나갔다.
  여순사건은 오랫동안 묻혀 있었다. 그 누구도 섣불리 진실을 얘기하기 어려웠다. 목숨을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던 이 사건은 오랜 기간 지속되면서 여수·순천·광양·구례·보성·고흥 등을 비롯한 37개 시·군의 광범위한 지역이 죽음의 연쇄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들었다. 독재정권은 이를 철저하게 이용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많은 시간과 용기를 필요로 했다. 반공국가를 만들자는 목표 아래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인한 정국혼란이 있을 때마다 빨갱이라는 단어는 어김없이 이 지역 사람들에게 자기검열을 요구하는 주홍글씨였다.
  저자는 한국 현대사에서 소외된 부분을 찾아 과감하게 문제제기했다. 이미 한 차례 『불량 국민들 : 여순사건 왜곡된 19가지 시선』을 세상에 선보인 적 있는 저자는 4년 만에 여순사건의 다른 이야기로 돌아왔다. ‘반란’ 또는 ‘항쟁’이라는 세간의 엇갈린 평가 사이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제14연대의 반란은 어떤 이유에서 발생하였는가를 두고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역사 기록은 대체로 승자가 남겼다. 승자의 문서로 작성된 여순사건은 왜곡된 역사의 전형이다. 사건의 주체인 제14연대 군인이 제주도 출동명령을 거부한 핵심은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명령의 거부로 끝나지 않고 봉기로 촉발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 이 책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왜 항쟁인가
  저자는 세간에 널리 퍼진 여순사건 대신 ‘여순항쟁’이라는 어휘를 제안한다. 많은 단어에는 권력 이데올로기가 깊이 투영되어 있다. 예컨대, 박정희가 5·16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혁명’이라고 지칭한 경우를 들 수 있다. 역사 기록에서 적합한 용어의 사용은 매우 중요하다. 용어의 선택이 역사적 성격은 물론 대중의 역사 인식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항쟁이라는 표기는 ‘부당하게 억압하는 것은 무엇인가’, ‘불법적 행위에 대하여 저항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춘다. 항쟁에는 세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첫째, 다수 또는 복수의 주체들이 함께 행위를 한다는 점에서 집단적, 대중적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둘째, 대체로 집단적 저항 실천이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 널리 의미가 확인되어 기록될 만한 사건임을 의미한다. 셋째, 항쟁은 언제나 지배적 위치의 타자 억압에 대한 주체의 대항적 움직임을 함의한다.
  1948년 10월 19일부터 1955년 4월 1일까지 이어졌던 여순사건은 대략 15,000~20,000여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재산 피해는 약 100억 원, 가옥 소실은 2천 호 가량으로 집계되었다.
  정부는 여순사건을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이라고 비난하였으나 그들이 명명한 ‘반란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그와 무관한 민간인 상당수가 희생되었다. 이는 1950년 초까지 계속되었다. 또한, 반란이 성립되려면 수도 점령이나 정부 전복, 권력자 축출 등의 계획이 있어야 하고, 새로운 권력 주체가 정해져 있어야 한다. 여수에 주둔했던 제14연대 군인이 주도한 이 사건은 그런 조건들이 하나도 갖춰지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봉기의 주체가 군인의 신분을 지녔다는 이유로 이들을 반란으로 규정하려는 시각이 여전히 존재한다.
  국군은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한다고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국가는 곧 국민이다. 군인에게 동족을 학살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1980년 5월의 대한민국 군인은 그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출동하였다. 그리하여 광주에서는 피의 학살이 자행되었다. 반면 1948년 10월의 제14연대는 명령에 저항하고 출동을 거부하였다. 이에 저자는 묻는다. “어떤 군인이 올바른 군인인가? 어떤 군인이 국민의 군인인가?” 그리고 나아가서 “어떤 군인이 대한민국에 존재해야 하는가?”
 
  여순사건에서 여순항쟁으로
  저자는 내년으로 70주년을 맞는 여순사건을 제대로 알리기 위한 시민강좌를 앞두고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문재인 정부가 국정과제로 삼고 있는 ‘4·3사건’, ‘5·18항쟁’ 진실규명처럼 정부의 개입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순사건이 4·3사건과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는데도 여전히 왜곡된 채 방치되고 있는 것은 문제라는 지적이다. 저자는 책에서 이를 법적, 제도적으로만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여순항쟁 전문 연구기관의 필요성과 지방정부의 적극적 참여, 행정적 지원시스템의 마련, 지역사회와의 연대활동을 남은 과제로 언급하였다.
  제14연대 군인은 국민의 목숨을 소중히 여겼던 올바른 군인이었다. 민중은 그에 호응하여 친일파에서 친미파로 돌변한 관료와 경찰의 부정부패, 부조리에 저항으로 맞섰다. 이를 반란으로 규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으며 여순사건은 사건의 본질인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는 목적을 위해 일어난 항쟁으로 명명되어야 적합할 것이다. 여순항쟁은 묻는다. 1948년 10월, 국가 권력은 정당하였고 국민의 동의를 얻었는가?




│본문속으로

미군정에게 있어 제주도는 자국의 이익에 필요한 군사기지로만 인식되었다. 미군정에게 그 지역에 사는 사람은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척결의 대상이었다. 이처럼 미군 지휘부의 인식은 제주비상경비사령부와 경무부에 그대로 전달되어 강경 진압작전이 이루어졌다. 이날 회의에서 조병옥 경무부장과 김익렬 연대장 사이에 토벌작전 문제로 육탄전이 벌어졌고, 마침내 김익렬은 제14연대로 전보 발령되었다.
-77쪽

스노우 보고서에는 정부에 비판적인 지방 관리의 발언도 있다. 유수현 구례군수는 반란군이 신사처럼 행동했다고 평가하였다. 이에 비해 정부의 위신은 떨어졌다는데, 이유인즉 반란군이 구례에 온다고 하자 구례에 있던 경찰과 국군이 모두 남원으로 도망가 버렸기 때문이다. 또한 반란군은 주민들의 식량을 가지고 갔지만, 국군은 식량, 의류, 이불을 가져가는 바람에 주민의 불편이 많다고 지적하였다.
-283~284쪽